[삼성종합기술원 사보 1996년 8월호] 학술행사를 다녀와서

조용한 고도(古都)에 울려퍼진 소리

김 진 오 수석

지난 6월 24일부터 러시아 싼 뻬쩨르부르그에서는 '4th International Congress on Sound and Vibration'이 개최되었다.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의미 의 싼 뻬쩨르부르그(St. Petersburg)는 1712년부터 1918년까지 약2백년간 제정 러 시아의 수도였다. -burg라는 독일식 표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14년에 러시아식 표현으로 뻬쩨로그라드로 바뀌었다가 볼셰비키 혁명 이후 레닌그라드로 개명되었었는데 소련의 붕괴 이후 본래의 이름을 회복한 것이다. 1917년에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린 10월 혁명의 신호탄 대포가 순양함 '오로라'호에서 포성을 울 린 지 80년이 지난 지금, 이 조용한 고도에서는 그때의 포성소리를 회고라도 하듯 '소리'를 다루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러일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는 군함 '오로라'호는 지금 강변에 정박하여 박 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인구 5백만의 싼 뻬쩨르부르그는 러시아 제2의 도시로서 문학·예술·과학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도시이다.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700 km 정도 떨어진 발틱해 연안의 네바강 어구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도시는 러 시아 해군의 근거지이자 조선산업의 중심지로도 유명하다. 또한 북위 60도에 위 치한 이 지역은 6월 하순경에는 밤에도 밖이 훤한 백야(白夜)현상을 보이고 있다.

나는 이 행사에 참가하면서,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는 단절되 어 있던 이 나라의 학문과 연구동향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발표 된 3백여 편의 논문 중 반 이상이 러시아 사람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 외에 한 국·미국·일본·호주·유럽 각국 등 40여개국 참가자들에 의한 발표가 있었다.

유체음향의 거목 Lighthill 교수의 특별 강연을 포함한 7편의 keynote address가 있었고, 24개의 oral presentation session과 3개의 poster session이 마 련되었다. 스피커 콘의 진동 해석에 관해 발표하려고 참석했던 나는 주최측의 실 수로 구두 발표일정에서 누락되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포스터 전 시. 미국과 러시아 사람들이 공동주최 하다보니 그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원만하지 못한 행사 운영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러한 어설픔을 충분히 보 상한 것은 러시아측 주최자가 준비한 여러 가지 문화 행사였다.

개회식 중에 공연된 현악 사중주는 소리에 관해 연구하는 참석자들에게 소리의 아름다움을 과시할 만한 것으로 앙콜 곡이 준비 안된 것이 아쉬울 정도였 다. 또한 백야 축제로 Shuralov 궁전에서의 만찬 때 보여준 러시아 민속음악과 댄스 공연은 러시아 고유의 뻣뻣한 음식을 잘 소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오랫동안 폐쇄된 사회였기에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러시아의 학문과 연 구활동은 참으로 다방면에 골고루 퍼져 있었다. 이 나라가 더 일찍 개방되었더라 면 지금쯤 기술의 실용화뿐만 아니라 상업화에도 뒤지지 않았을 저력이 느껴졌다.

또한 그들의 우수한 잠재력을 몇십 년간의 공산주의 체제가 억눌렀다는 것이 여러 면에서 눈에 띄었다. 우리에게는 귀에 익은 '고객 만족'이라는 개념이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 듯 했고, 식당에서는 획일성의 잔재를 경험해야 했으며, 국제공항의 입국수속 행렬과 국내선으로의 불편한 이동은 이들이 과연 '경쟁력'을 의식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도심지를 걷다 보면 낡은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으로 인해 호흡 에 고통스러움을 겪을 정도이니, 이들에게는 자동차 소음 저감을 위한 연구보다는 공해 저감 연구가 더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D자동차회사가 러시아 에 수출을 준비중이라 하는데, 이들에게는 환상적인 자동차로 보일 것이다. 한국 의 가전 제품들은 이미 러시아 시장에 본격 진출했고, TV의 광고나 거리의 대형 광고판에도 등장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북한이 우리에게 아직도 가깝고도 먼 나라라면 러시아는 멀지만 가까운 나라로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