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종합기술원 사보 1995년 8월호] 연구글밭

포리지가 준 해외여행의 참맛

김 진 오 수석

일주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7월초에 벨기에와 영국에 다녀온 출장기간 중의 체험은 지금까지의 여느 출장 때와는 다른 감흥을 남겼다. 수백 년간 반복 적으로 이웃국가들로부터 침략과 점령을 당한 벨기에의 역사는 우리와의 동병상 련을 느끼게 했다. 그러한 수난의 와중에도 그들은 전통과 문화를 간직하면서 학 문과 외교분야에 입지를 견고히 하고 있다.

암스테르담과 브뤼셀간의 이동을 기차로 한 덕분에 한국에서 배낭여행 온 젊은이들을 볼 수 있었다. 10여년전에 학창생활을 한 사람으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그들의 모험심과 도전정신에 경탄하면서도, 이 젊은이들 앞에 도사리고 있 을지도 모르는 여행의 위험이 걱정되는 것은 어느새 나도 나이든 축에 속했다는 뜻일까?

브뤼셀 근처의 작은 도시 러번(Leuven)에 있는 업체를 방문해 기술협력 상담을 무사히 마치고 브뤼셀에서 하루 저녁을 지내게 되었는데, 마침 운 좋게도 매주 화요일에만 개최된다는 벨기에 전통 민속 축제인 '옴메강(Ommegang) 페스 티발'을 구경할 수 있었다. 우연히 동행하게 된 배낭 멘 여학생과 흥겨운 행사에 몰입돼 갑작스런 폭죽소리에 놀라기도 하며 손뼉치고 웃고 떠들던 시간이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

하루 예산 20달러로 숙박과 끼니를 해결하며 앞으로 20일을 더 그 무거운 등짐을 지고 다니며 여행할 거라는 여학생에게 부러움과 안스러움을 동시에 느끼 며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럽대륙을 종횡으로 누비며 견문을 넓히고 있을 한국의 젊은이들이 무사히 여행을 마치기를 빌며, 장차 세계화된 한 국의 자랑스런 일꾼이 되기를 기대한다.

초음파 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한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 (Edinburgh)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행사장 주변의 호텔들이 모두 만원이 라는 난감한 소식이었다. 8월의 축제 기간 외에는 호텔이 남아돌아 예약이 불필 요하다는 여행안내서의 설명을 너무 믿은 게 잘못이었다. 여행안내센터에 문의해 찾아낸 숙소는 버스로 20분을 더 가야하는 한적한 게스트하우스였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찾아가 이틀간 숙박을 한 게스 트하우스에서 나는 스코틀랜드의 전통을 일부나마 맛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제 공되는 아침식사 중에는 포리지(porridge)라는 죽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트밀을 익혀 만든 것으로서 스코틀랜드의 명물 요리의 하나인 이 죽을 먹기 위해 어떻게 먹는가하는 방법을 주인에게 물어 보아야 했다. 우선 죽에 우유를 붓고, 첨가물 을 가한다. 미국인은 잼이나 버터를 치고 잉글랜드인은 설탕을 뿌리는데 반해서 스코틀랜드 방식은 소금을 약간 쳐서 먹는 것이라 한다. 영국의 일부이기보다는 독립된 스코틀랜드이기를 고집하는 그들의 주체성을 엿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영국인들이 전통에 매우 강한 집착을 한다. 그 한 예가 2층버 스인데 마차가 교통수단이던 시절에 사람을 더 태우려고 마차 지붕에도 의자를 배열했던 것이 유래라고 한다. 몇 년전에 서울에서 만원버스 문제를 해결하고자 비싼 돈 들여 2층버스를 사들여 왔다가 육교 때문에 서울시내에서는 운행이 불가 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생각났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해외출장의 이면에 숨겨진 고독을 조용한 에딘버러 에서 절감했으나, 아침식사때 맛 본 포리지가 그러한 고독감을 충분히 상쇄시켜주 었다. 영국에 가는 사람들이여, 비싼 호텔보다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아침식 사때 포리지를 맛보시라. 스코틀랜드인들의 채취를 흠씬 느끼게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