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벗 2001년 9월]

 

아버지를 배웅하고


김진우 집사

     지난 4월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대학에 가 있는 딸의 방학을 대비하여 학년말 시험 격려도 할 겸 기숙사에 있는 짐을 꾸려 오기 위해 식구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왕복 7시간 걸리는 여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밤 12시가 넘었다. Caller ID를 통해 낮부터 한국에서 전화가 수없이 걸려 왔던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시 ... 또 벨이 울렸다.  아버지가 의식이 없으시고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시며 하루를 넘기기 어렵다는 동생의 전갈을 받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순간적으로 두뇌 회전이 멈추었다.  2월 방문 후로 통증도 없어지고 식사도 잘 하시고 체중도 회복되셨다고 무척 희망적이었는데 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정신을 가다듬고 항공사에 예약을 하고 2주간 집을 비울 것에 대비하여 집안 일과 회사 일을 대충 정리하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제가 도착할 때까지 아무 일도 없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의식을 회복시켜 주세요.'

     1부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되었건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오후 1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10시쯤 J. F. K. 공항으로 떠나야 하는데 그동안 머리를 정리하며 홀로 묵상을 하고 싶다.  7시 반쯤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를 영안실에 모셔 드렸어요."  두뇌 회전이 멎었는지 그 말뜻을 순간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가 지나서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인천 공항에 내려서 많은 것이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김포공항 대신 생소한 인천공항의 거대함뿐만 아니라, IMF 전까지는 출장 차 김포공항에 도착하면, 큰아들이 왔다고 직접 공항까지 마중 나와 반가이 맞아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곧바로 영안실에 도착하니 저녁 6시경, 아버지께 분향 인사 드리고 약 30분 후부터 입관 예배가 시작되었다.

     모든 일정을 치밀하게 짜 놓은 둘째가 '연길에 사는 셋째는 백두산에 수련회를 인솔해 가서 이번에는 일정이 맞지 않아 오지 말고 다음번 대전 국립 현충원에 안장해 드릴 때나 오도록 했다'고 귀띔해 준다.  조문객을 맞으며 거의 밤을 새우고 다음날 새벽 5시 50분 발인 예배가 있고 7시 벽제 화장터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짤막하게 간증을 하였다.

     우리 집안 내력을 보면 구약의 축소판 같다.  학창시절 기계체조를 하셨던 아버지는 체격이 매우 강하셨기에 일제시대 징병 가서 요즈음의 공수부대에 해당하는 공정대에 차출되셨다.  동남아에 낙하산을 타고 10여 차례 침투하셨건만 그때가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이라 미군들에게 총 한발 안 쏘고 후퇴, 원대 복귀만 하셨단다.  해방 후 육사1기로 국군에 입대하시어 몇 년후 6.25 사변으로 무훈을 날리시다가, 휴전이 되고 55년에 내부 갈등으로 별자리를 포기하고 대령으로 예편하셨다.  그후 10여년 후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증권 투기로 몰락하기 전까지 전성기를 누리셨다.

     10년쯤 전에 어머니가 주님을 영접하셨고 그 후에 들은 얘기에 의하면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교회에서 직분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셨고 아버지가 영아 세례를 받았었다는 숨겨진 사연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다시 품 안으로 불러들이려고 여러 해를 기다리셨건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교회를 멀리 떠나 유교식으로 생활을 바꾸신 할아버지는 식구들이 교회 다니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기독교 학교를 다녔던 어머니도 뚜렷한 종교관 없이 아버지와 함께 종교라는 관념 없이 보통 사람들처럼 세상일에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셨다.  그러던 중, 집안의 대들보인 아버지가 실패를 더듭하여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건만 그 어느 누구도 영적인 면에서 이 과정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나 잘 나가시던 작은아버지와 고모부도 차례로 거의 정상까지 올라간 직장을 본의 아니게 그만 두셔야 했다.  이럴 때 누가복음의 탕자처럼 아버지께로 되돌아갔어야 하는데 오히려 어머니는 절에 다니며 백일 기도를 위해 새벽에 산에 다니시며, 쓰러진 집안을 일으키겠다고 눈물어린 정성을 쏟으셨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우상 숭배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항상 열어놓으시고 그때그때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리고 우리 가정을 사랑하사, 이 기회를 여러번 주시건만 깨닫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것을 체험하고 그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나에게 직장을 예비해 주셨고 그 직장을 통해 미국에 체류할 기회를 주셔서 '교회 문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집안이 망하는 줄 알거라'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세뇌당한 나를 '고난받음이 유익이라'고 하신 시편 기자처럼 고통의 연단을 거쳐 결국 주님을 영접하게 하셨다.  특히 결혼 후 하나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고 수년간 발버둥쳐 보았지만 끝내 품안에 품어 주신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생사 기로에서 아찔할 정도로 감사하다.

     그 후 주님의 권능의 역사는 계속되어 몇 년 사이에 부모, 형제 전 가족이 모두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믿기 직전 어머니는 속상한 일로 밤잠을 못 이루시며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셨단다.  집을 담보로 대출 받아 이자 놀이 하시며 생활비를 마련하셨는데 돈 빌려 간 이웃이 망해 앞날이 캄캄해 진 것이다.  그러던 중 훗날로 미루기만 하던 교회가 생각났고 출석을 시작하셨다.  울고불고 하던 아내가 미소 띤 모습으로 편히 잠을 자는 것을 지켜보던 아버지도 '교회에 뭔가 있긴 있구나' 하시며 어머니와 함께 교회 다니기 시작하셨다.

     훗날 아버지가 나에게 고백하신 것이 있다.  "얘야, 내가 태어나서 그런 대로 부귀 영화 다 누려 보고 바랄 것이 없지만 한 가지 못해 본 것이 있었다."  교회 열심히 다니며 신앙 생활 하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웠단다.  아버지는 일생을 살아오신 것처럼 순수하게 원칙적으로 신앙생활을 어린아이와 같이 시작하셨다.  성경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어 성경 공부를 하려고 찾던 중, 대학생 반이 있는 것을 아시고 담당 부목사님께 허락을 구했더니 부목사님은 '상품을 드릴테니 출석을 하지 않아도 돼요.'  아버지는 '상품은 안 받아도 좋으니 출석만 하게 해 주세요.'  결국은 두가지 모두 얻으셨다.  IMF 이전 한국 출장을 가면 아버지, 어머니와 손을 잡고 교회로 걸어가는 길이 마치 천국을 향하는 길처럼 행복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언젠가 찬양 예배 때의 일이다.  초청 강사께서 설교 도중 '여러분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갑자기 아버지가 손을 들며 '교회 예배당에서요' 옆에 앉아 있던 내가 약간은 당황을 할 정도였다.  집에 와서 여쭈었더니 '목사님께서 전에 설교하실 때 질문을 아는 사람은 주저 말고 대답하라고 가르치셨다'는 것이었다.

     70세 이상으로 구성된 '에녹회' 남선교회 회장을 세 번 하시며 무척 열성을 부으셨다.  다행히 출장 기간과 맞아 아버지가 사회를 보시는 헌신 예배에 동생들과 함께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각 선교회가 순번으로 헌신예배를 오후 4시부터 하는데, 4월 마지막 주일이 가장 연령이 높은 에녹회 차례다.  설교만 제외하고 모든 순서가 회원들로 진행되는데 아내와 손주들까지 함께 찬양을 드리고 아동부 학생들이 가슴에 꽃을 달아 드리는 시간에는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였다.  광고 시간에 아버지가 하신 내용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본인이 우리 교회를 다닌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60대에서 올라오는 새 회원이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특별히 배려를 받는 특혜가 있어 모임도 별장에서 갖습니다. (별장은 별관을 뜻함.) 그러니 빨리 승진하여 올라오십시오.'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다니셨던 덕분에 거의 모든 행사에 참여하실 수 있었다.  현재 회장님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께서는 경조사 등 모든 일에 참석을 하셨기에 교회에서 공식으로 나오는 예산 외에도 개인적 찬조금이 많이 들어와 봄, 가을로 관광을 자주 다닐 수 있었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마지막 기도 제목은 에녹회 헌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회복을 위해 비타민 주사보다 고통스러운 암침 시술을 매일 받으시며 신음도 내지 않으셨다고 간호사도 감탄하였다.  아버지는 때를 아신 것 같다.  떠나시기 이틀전 날 옆에서 병간호 전담하던 막내에게 여러 가지 담겨 있는 서류 가방을 가져오게 하신 후 유언을 남기셨고 하루 전날은 어머니께서 평소 좋아하지도 않던 김밥을 사오라 하여 두 번에 걸쳐 다 잡수셨다고 한다.  먼 길을 떠나기 위해, 주님 만나러 가는 길을 소풍가는 기분으로 준비하신 것 같다.  에녹회 헌신예배가 4시에 시작되고 44분 후에 주님 곁으로 가셨다.  살아서 병약한 육신으로는 참석할 수 없는 것을 아시고 대신 영혼이 예배에 참석하게 하셨다고 위로를 받는다.  이번 일을 위해 자식 중에 여기 저기 준비를 많이 한 둘째네 가족 모두가 임종을 지켜보는 축복을 누렸는데 모습이 머무 평온하셨다며 형님네가 기도를 세게 하셨냐고 묻기에, 결혼식에는 못가도 장례식에는 가능한 참석하고, 육신의 부모를 직접 못 모실 경우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머니와 함께 새벽 예배에 참석하는 신앙생활을 소개하였다.

     벽제 화장터에는 쉴 새 없이 영정을 들고 상객들이 들어온다.  크게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넋을 잃을 정도로 통곡하는 가족들과 찬송가를 부르며 편히 가시라, 우리 곧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가족들.  지옥과 천국의 갈림 길 목에 서 있는 듯 하다.  주님께서는 이 기회에도 전도하기를 원하셨다.  정확히 20년전 결혼식 때 보고 처음 만나는 친척들, 그때는 전혀 믿지 않던 내가 너무나도 변하여 염을 하고 입관하는 때까지 대성통곡은 커녕 나즈막히 기도하며 찬송하는 모습에, 예사 신자 같지 않다며 몇가지 질문들을 하신다.  믿음 생활 초기에 집중적으로 훈련받는 구원의 확신, 사영리, 전도 폭발의 내용을 토대로 간단히 답변하였다.

     안 믿거나 천주교가 대부분인 친척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슬픈 분위기를 예상했건만 평온한 상주들의 행동에서 다행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왔을까 생각해 본다.  '중보기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형제 자매들이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슬픔으로 가득차 있어야 할 맏 상주인 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할 정도로 슬픔을 누르고 기쁜 마음이 밀려오곤 하였다.  항상 기뻐하라 하신 것 처럼, 더 좋은 나라로 고통도 없이 가신 아버지를 기뻐하라는 마음이 가득 차게 되었다.  이러한 권능에 힘입어 전도의 말도 필요없이 분위기로 전도가 시작된 것이다.

     한편, 주님은 홀로 있는 외로운 형제 자매들을 위해 중보 기도가 필요하다고 절실히 실감하게 하셨다.  최전방 선교지에서 고군분투하는 선교사들에게 우리들이 중보 기도함으로써 그들이 받은 권능이 소진하지 않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다시 한번 깨우쳐 주신다.  또한 병약하거나 영육간에 나약하여 남 모르는 고통을 받는 그래서 외로움을 느끼는 형제 자매에게 힘을 되찾도록 합심 기도하도록 하신다.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버지의 성경책을 보았다.  빨간줄, 자그마한 글씨로 빽빽하다.  겉장 안 쪽에 당신이 좋아하는 성경구절과 찬송가가 적혀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밑에 아내가 좋아하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훈장을 여러개 받으셨던 아버지는 국가 유공자로서 대전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셨다.  태어난 천안, 제대 직전 복무하던 논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잠드신 것이다.  보훈 제도가 생기기 전에 너무 일찍 제대하셔 국가로부터 연금 혜택을 전혀 못받아 섭섭해 하셨을 부모님.  이번 합동 안장식을 통해 위로 받으시고 흐뭇해 하셨을 어머니를 생각해 본다.  멀리 떨어져 사는 큰아들, 장손이 제대로 못할 묘 관리를 일년 내내 국가가 해주고 현충일 되면 근처 학생들이 헌화하며 추모하니 또한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올해처럼 한국을 여러번 자주 방문한 적이 없다.  아버지를 먼저 떠나 보내 슬프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못보던 큰아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슬픔을 이길 수 있었다는 어머니와 다시 기약 없는 작별을 하고 떠나 왔다.  20여 년 전 처음 미국행 비행기를 탄 때부터 이번처럼 무겁고 힘든 마음으로 한국을 떠난 적이 없는 것 같다.  넉넉하지 않은 교수 월급으로 병원비 등 모든 일을 관리하며 선납하던 둘째의 고충을 느낄 때마다, 은퇴 후의 여러 가지 복지 혜택에 관한 직장에 다니면서도 막상 아버지를 위해서는 전혀 도움을 드리지 못해 얼마나 안타까와했던가.  미리 대비를 했더라면 이런 재정적인 걱정은 안해도 되련만...  다른 한편으로 마음의 위로가 온다.  더 중요한 영적인 대비가 없었다면 얼마나 슬픔의 몸부림을 쳐야 했을까.  영생의 확신과 소망으로 슬픔의 많은 부분을 극복할 수 있으니 아버지를 자녀로 채택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폐암이라는 진단이 나왔을 때는 우리의 기도를 못 들으셨냐고 주님을 원망한 때도 있었지만 고통의 기간이 길지도 않았고 편안히 주무시는 듯한 모습으로 입관 예배를 드릴 때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듯 병마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수 있는 것처럼, 이제는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볼 수는 없지만 이 몇 달의 과정을 통해서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주위 친척 중 구원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을 믿는다.

     지난 겨울부터 너무나도 많은 교우들의 부모님이 별세하셨다.  장손이면서 장례식과 안장식에 참석 못하는 자녀들과 정신없이 장례에 참석하느라 장남 구실을 제대로 못했다는 죄스러운 마음에 무리를 하면서라도 추모예배를 드렸다.  그동안 저희들을 위해 중보 기도로, 추모 예배를 통해 위로하시고 사랑해 주신 교우님들과 가정에 주님의 평강에 축복하심이 충만하기를 간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