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한국일보 1993. 7. 12.] 애독자 페이지

미국 속의 문화민족

김 진 오 (스코키 거주)

메이플라워호가 보스턴 근교에 닻을 내린 이래 계속되어 온 미국으로의 인구 유입의 결과로 미국은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나라가 되었다. 서로 다른 인종의 구성원들이 합쳐져 용해되어 있다고 끓는 도가니(melting pot) 같다고 표 현되기도 하고 서로 합쳐져 있기는 하되 동화되지 못한다고 샐러드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 나라에 백년의 이민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민족은 최근 30여 년간의 활 발한 이민에 의해 미국내 여러 곳에 한인타운을 형성하고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갖는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우리 자신은 여전히 미국내에서 소수 민족이라고 생 각할 지라도 공식적으로 일컬어지는 마이너러티에는 이미 포함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확보한 미국내에서의 삶의 터전에서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한 방안들이 뜻있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모색되고 있다. 이중 대표적인 방안이 정 치력 신장이다. 특히 지난해 L.A.에서의 4.29 폭동사태를 겪으면서 정치력 부재 에 의한 무력감을 느낀 바 있기 때문에 정치력이 한인사회에 절실한 문제로 대두 되고 있다. 그런데 정치력 신장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종종 간과되곤 한다. 다름 아닌 민족 문화의 보존과 홍보이다.

미국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또는 상류사회에 진입하기 위해서 미국 주류 사회와 미국 문화에 동화되고자 하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해 본 사람들 이 많으리라 짐작한다. 자신이 아무리 어메리칸이 되고자 노력하고 미국 시민권 을 가지고 있다할 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시안 어메리칸인 것이다. 그 렇기에 미국 땅에서 생존과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미국내의 한인 커뮤니티의 성장과 이를 발판으로 한 민족적 아이덴티티 확립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여 기에 민족 문화 보존의 필요성이 있다.

이는 스스로 나라를 선택한 이민 당사자보다도 본인들의 뜻과 무관하게 이 땅에서 출생과 성장을 하는 2세들에게 더욱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미국인들 과 똑같이 교육받고 노력과 능력에 의해 두각을 나타내면서도 때때로 인종 편견 에 의한 차별을 받을 때 느끼는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코리안 어메리칸임 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민족 문화의 보존과 더불어 또 한가지 필요한 것은 우리의 문화를 타인종 사람들에게 활발히 알려 그들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타인종 사람들과 접촉이 별 로 없는 한인들이 그들에 대해 거부감이나 경멸감을 갖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로 한인들과 친밀한 접촉이 없는 타인종 사람들은 한인들에게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차피 타인종과 어울려 살아가야 할 바에야 좀 더 적극적으로 임하는 게 좋을 것이다. 우리끼리 모여 남들보다 우리가 낫다고 자화자찬 만 할 게 아니라 우리의 우수한 문화를 남들에게 알리고 한편 다른 민족 문화의 좋은 면에 대해서는 칭찬에 인색치 않는 자세가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민족 문화와 관련된 사례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5월 하순의 주말에 시 카고 인접 교외인 스코키에서 연례행사인 민족문화축제(Festival of Cultures)가 개최되었다. 시카고와 부근에 거주하는 십여 민족들이 참여하여 각 민족들의 고 유 문화를 소개하는 행사였다.

행사장에 마련된 특설 무대에서는 각 민족 사람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자 기 민족의 문화를 선보이는 공연을 하며 모국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설명하였 다. 그 앞마당에서는 미국을 비롯하여 아씨리아. 스웨덴, 아르메니아, 중국과 대 만, 인도, 일본, 그리스, 이스라엘, 필리핀, 태국, 아프리카 사람들이 각기 한자리씩 차지하여 특색있는 물품과 화보를 전시하고 있었다. 또 한편에서는 각 나라 음식 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그런데 문화민족이라고 자부하는 한국사람들의 참여가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보조 무대에서의 태권도 시범과 기타 문화(other cultures)라고 뭉 뚱그려 놓은 곳의 한 구석에 A백화점에서 나온 특산품 판매가 참여의 전부였다. 각 나라의 국기들을 게양해 놓은 곳에 태극기가 빠져있었다. 우리끼리의 문화 행 사도 의미가 있을 테지만 이와 같이 타민족들과 어울려 자연스럽게 우리의 문화 를 소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한인회장 선거 때마다 입후보자들의 선거공약에도 문화 행사 추진 또는 이민 문화 창달이라는 항목이 있으므로 앞으로 좀더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우리 문화의 홍보 활동을 기대해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