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한국일보 1993년 4월 6일.] 독자 페이지

한글 도로표지판 설치 바람직한가?

김 진 오 (스코키 거주)

시카고 로렌스 길에 한글로 '서울 드라이브'라고 쓴 표지판을 설치하기 위 한 준비작업이 한인회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시카고 시의원들에게 협조를 요청 하고 주 교통국과 합의가 이루어질 경우 3월말에서 4월중순 사이에 표지판 게양 식을 할 계획이라 한다. 한인 커뮤니티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소식을 듣 고 염려되는 바가 있어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약 5년전에 필라델피아에서도 한인회의 주도에 의해 한인 밀집지역에 한 글 도로표지판이 설치된 적이 있었다. 시청의 당국자로부터 정식허가를 받았기에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설치한지 며칠만에 스스로 철거하고 말 았다. 그 이유는 한글 표지판에 반발하는 타민족 주민들에 의해서 밤마다 스프레 이 낙서로 그 표지판이 훼손되곤 하여 없느니만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재임기 간 중 업적을 만들고 싶었던 당시 한인회 임원들은 오히려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한국의 중앙집권식 행정에 익숙하여 행정책임자의 허가를 얻으면 된다고 생각하 고 주민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결과였다.

시카고 로렌스 길 주변 한인 밀집지역의 규모가 필라델피아의 그것에 비 해 크기는 하지만 밀도에 있어서는 그리 다를 바가 없다. 로렌스 길 주변에 한인 상가와 교민들이 많이 몰려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지역 주민의 대다수 가 한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로렌스 개발위원회 측인 공식 입장을 밝히 지 않은 채 현판식 연기를 요청하였고 사무국장은 현판식에 대해 반대 입장을 거 듭 밝혔다고 한다.

이 일을 추진하고 있는 한인회에서는 이 지역 타민족 주민들의 양해를 얻 기는 고사하고 한인들의 의견을 수렴했다는 얘기조차 들은 바 없다. 한글 도로 표지판이 설치되면 많은 한인들이 기쁘게 생각할 줄 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이르다고 본다. 무리하게 이 일을 추진할 경우 가뜩이나 소수민족들 간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는 판에 부작용이 크게 나타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어려움 속에 선출된 현 한인회장단이 그동안 한인사회를 위해 헌신해온 노력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혹시라도 임기 말에 오점을 남기는 게 아닐까 염려되 어 이 글을 드린다. (끝)